5월 10일 제2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길고 짧고 진의를 떠나 메시지가 약하고 또렷하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
어찌 대통령의 취임사를 이러쿵저러쿵 할까만 우리가 아는 대통령의 취임사는 취임준비위원회에 전문 기록 담당자가 있었고, 그들이 원고를 써 올려 받은 초안을 가지고 위원장의 검토 승인을 마친 후 최종 취임하는 당사자 대통령이 수정을 했을 건데, 이런 절차가 무시 생략됐을 리는 없을 건데도 너무 과하게 삭제 수정을 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하급이라고 들려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신문사의 사설이나 칼럼도 누가 써 오리면 편집국장이 검토하고 사장도 미리 보고 한두 곳 수정 삭제 보완, 하물며 대통령 취임사라면 인수위로부터 위원장까지 줄줄이 읽고 검토를 했을 건데 어떤 과정에서 누가 썼고 누가 삭제 수정을 했는지 최종 나타난 연설문을 보면 전문가가 초고를 쓴 후 검토하는 등 보완 절차를 무시 한듯 하다.
집어내 던진 건지 기록비서관들의 문장이라고는 봐줄 수가 없어 멀국만 젖다 만 느낌이다. 자세한 긴말이 뭐가 중요하냐 하면 안 된다. 인간의 삶이란 글자 발명으로 말이 확정된 후, 말이 곧 행동을 결정짓는다고 하는 것은 지식도 아니고 지성도 아닌 상식적인 해석이니 하는 말이다.
행동이 하나라면 글자는 둘 셋 이다. 글자가 둘셋이라면 말은 넷 다섯 이다. 말이 넷 다섯이라면 생각은 열 스물이다. 생각은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아 생각을 다 글로 쓴다는 건 턱없이 부족한데, 이런 글을 말로 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 이게 지식의 세상이고 이런 걸 지성인의 문명 사고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취임사 원고 글은 논문 계열에 가까워 연구서를 보는 듯했다. 제목을 붙이라면 “자유연구론”처럼 들렸다. 아무리 잘 쓴 글도 쓰고 나면 독자의 것이 되는 것처럼, 아무리 유창한 말이라도 입에서 나가는 순간 그건 듣는 사람 청자(聽者)의 소유가 되지 화자(話者)에게서는 떠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취임사는 학술 발표문처럼 들렸다는 건데, 이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들으라거나, 가청력이 엉망이라는 주장은 거꾸로 분석함이 마땅하여, 말을 제대로 하라는 반격을 받게 되는바, 이러면 화자귀책 청자귀책을 떠나 왜 애써 말하고 말한게 언쟁이 되고 의견충돌을 일으켰느냐로 가게 돼 결국 화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자유란 민주주의 근본으로서 자유라 하면 페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친 미국 독립선언 4대 정신의 첫째로서, 이게 현 자유민주주의의 발상으로 아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그런데 그때 외친 자유는 미국인들이 영국 신민지 제국주의에 항거한 반항이고 도전이었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정신과 동질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자유가 없지 않다. 자유가 도를 넘어 개인주의가 우려될 지경이다. 인사를 하든 말든 자유고, 효도를 하거나 말거나 공부를 하거나 말거나 간섭하지 말라는 등 자유가 이런 쪽에서 저항과 반항과 비인간적인 권리가 되어가는 중이다.
뭐든 내 맘대로 여서 시집 장가가라 하면 쌈 난다. 왜 일을 하지 않느냐 하면 싸우자는 말이 되고 만다. 이런 자유에 대한 인간의 본능이 오히려 인간의 인격권을 침식하여 말을 듣지 않아도 자유라는 등 도전과 반항의 근거가 되어 걱정인 중이다.
그러니까 대통령 취임사는 생뚱맞게 들린다. 왜 35번이나 자유라는 단어에 몰두했느냐에서, 이건 거의 초고를 쓴 기록전문가의 글이라고 보이지도 않는다. 언론사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자 전공분야에서 칼럼을 쓰듯이, 최소 칼럼 리스트가 초고를 썼더라도 저랬을까 싶어 자유 중심의 글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먼 내용들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게 메시지다. 이때의 메시지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런 제목이라면 어떤 각오라든지, 어떤 계획이라든지, 어떻게 따라 달라든지, 뭔가 국가가 원하는 이 시대의 정신이 무엇이라고 보기에 어떻게 하겠다 라든지... 취임사는 취임하는 대통령의 각오와 충성 다짐 등 열백천 가지도 넘는 엄청난 주제를 압축해 명료한 뜻을 담았어야 했다.
저작권자 ⓒ BK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